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임종시 "내가 이 인생의 희극에서 내 역할을 마지막까지 훌륭하게 해냈다고 생각하지 않소? 이 연극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셨다면, 부디 박수 갈채를, 그리고 여러분께서 모두 만족하고 돌아가시길"라는 말을 남겼다. 아내 리비아에게 전하는 사랑의 말과 함께. 악성 베토벤도 비슷하게 ""Plaudite, amici, comedia finita est (박수를 치시오. 코미디-희극-은 끝났소)" 말하였다는 말이 있다.[각주:1] 대과학자 아이작 뉴턴의 말은 그 보다 겸손하다.

 

“나는 해변(海邊)에서 조약돌이나 조개나 주우며 소일하는 아이와 같고, 내 앞에는 밝혀지지 않은 거대한 대양(大洋)이 펼쳐져 있을 뿐이오.”

 

좌우간 각설하고 그 보다 거대한 존재인 창조주 신에 대한 그의 생각도 의외로 복잡한 것 같다. 그 당시의 영국인이라면 의레 영국국교도이거나 지성인으로서의 유럽인이라면 기독교인이거나 아니면 무신론자이거나 할 것이라고 생각될 이 아이작 뉴턴의 종교관이 의외로 복잡한 것 같다. 어찌보면 종교시대의 "과학자"로서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요즘에는 그를 기독교인이기는 하되, 이단이라고 간주하는 것 같다.

 

물론, 그는 국교도의 39신조에 서명하기는 했다. 문제는 그 이후 그가 신학에 대해 공부를 했고 거기서 남겨노았던 노트가 최근 연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유명한 아타나시오스-아리우스 논쟁에서 이단으로 단죄된 아리우스 파의 견해를 옳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해, 그는 삼위일체를 거부하고 예수를 신이 아닌 신과의 매개자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예수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다. 즉, 뉴턴은 아리우스파인 것이다.

 

운동의 법칙을 발견했지만, 그는 세계를 단순한 기계로 보는 것에 반대했으며 조물주로서의 신을 믿었다. 이 점에서는 그의 적수라는 철학자 라이프니쯔와 신에 대한 견해를 놓고 논쟁도 한 것 같다. 아마도 라이프니쯔의 신의 개입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공격이었던 듯하다. 그에게는 이성적 존재자가 행성의 궤도를 결정했을 것이라 한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만하지만, 뉴턴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성서에 대한 연구는 물론 특히 과학자답지 않게 예언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성서에 의거 세계는 서기 2060년 이전에 종말하게 되었다나?

 

 

좀 우습게 되었지만, 뉴턴은 아이러닉하게 신학에 관심이 많았고 이단으로 여겨졌던 아리우스파의 신앙을 공공연히 주장할 정도였다마음 속으로 간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서와 예언 속으로 파고 들었다는 것을 보니 그 또한 과학자로서 미신에 빠졌던 사람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쩌면, 현대의 과학자들에게는 그 또한 "일그러진 영웅"일 수도 있겠다. 그는 근대가 아니라 전근대를 이어주는 과학자였다.

 

 

 

  1. 베토벤의 죽음을 목격한 Hüttenbrenner는 이를 부인했다고 한다. 출판업자로 부터 12병의 와인선물을 받았을 때 "저런 저런 너무 늦었어"가 마지막 말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비서 신틀러에 의하면 그가 죽음을 예감했을 때 했던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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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chopenhauer

 

역사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의외로 많은 것 같다. 히틀러 역시 그랬다고 그의 <나의 투쟁>에 밝힌 바가 있다. 그가 역사를 좋아한 동기에 대해 당시 실업학교 재학중의 역사 교사인 레오폴트 포츠크( Leopold Poetsch)에게 감화받아서라고 하는데, 그의 스승은 열열한 범게르만주의자로 아리안족의 우수성과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열등함을 주장했다. 계속해서 히틀러는 그에게 배웠다는 자신의 역사인식을 드러낸다. 오스트리아 제국 밑의 독일민족의 상태에 대해서는 이렇게 분개한다.

 

합스부르크(Habsburg) 가문의 일들에 관한 우리들의 역사지식은 매일 매일의 경험으로 견고해진다. 남과 북에서 이민족이란 독이 우리의 민족성을 좀먹고 있으며, 비엔나(Vienna) 조차 점점 눈에 띄게 비독일적 도시로 되어가고 있다. 황제 가문은 체코화되가고, 오스트리아-독일주의의 최고 적인 프란시스 페르디난트(Francis Ferdinand) 대공이 그 자신이 주조한 총탄으로 쓰러지게 한 것[각주:1]은 영원한 정의과 거침없는 정의의 여신의 손이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까지 성장하게 된 것은 오스트리아의 슬라브화의 후원자였던 그 자신 때문이었다.


독일민족이 감당할 짐은 어마어마했고 중세(重稅)과 피로 바칠 희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완전한 맹인이 아니라면 누구나 이 모든 것이 헛됨을 인식할 수 밖에 없다. 가장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이 전체계들이 독일과의 동맹으로 도덕적으로 완전세탁되었다는 사실로, 그 결과 이 늙은 군주제 안에서 게르만주의의 느린 절멸이 어떤 의미로 독일 자신에 의해 인정받게 되었다. 합스부르크판 위선은 오스트리아 지배자가 자국을 독일국가로 보이게 만들 수 있었는데, 그 가문에게 타는 듯한 분노에 이를 증오와 동시에 경멸을 키워 주었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에 대한 태도는 위의 오스트리아나 반유대주의와는 조금 다르다. 어린 시절의 히틀러는 사회민주당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를 가졌다고 말한다.

 

보통선거와 비밀투표에 대한 투쟁을 하는 데 대해 나는 근본적으로 기뻐했다. 그 때 조차 나의 지성은 나에게 내가 그리도 미워하던 합스부르크 체제를 약화시키는데 도움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민족의 희생 위에서가 아니면 존속될 수 없음과 독일적 요소의 점진적 슬라브화란 댓가 조차도 궁극에서 제국의 실제 생존을 보증치 못함을 확신했던 나는, 1억 독일민족을 죽일 이 필망할 국가의 붕괴를 불가피하게 이끌 모든 진보에 기대했던 것이다. 언어적 바벨탑이 부식되고 의회가 해체되어 갈 수록 바빌론 제국의 해체의 불가피한 시간이 독일계 오스트리아 민족의 해방의 시간과 함께 가까와 오는 것이다. 이런 식만이 오랜 모국과의 합병(Anschluss)[각주:2]이 부활될 수 있었다. 따라서, 사회민주당은 내게 싫지 않았다. 그들이 노동자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투쟁한다는 사실-순진하게도 난 그것을 믿었었다-은 역시 그에 역행하기 보다 순행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독일주의의 보존을 위한 투쟁에 대한 그들의 적대자세였는데 슬라브 '동지들'에 대한 역겨운 구애였고, 후자는 실제적 양보가 관련된 한에서는 사랑맹세를 받아들였으나 달리는 거만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꼴불견의 이 걸인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주었다. 이렇게 17세에 "마르크스주의"란 단어는 내게 생소한 반면 '사회민주당'과 사회주의는 내게 동일한 개념으로 보였다. 이에 다시 한 번 첫 운명이 내 눈에 전에 없던 이 민족에 대한 배신을 보이게 햇다. 그 때까지, 나는 사회민주당을 몇몇 시위대의 구경꾼으로만 알고 그 지지자들의 심성이나 그 교의의 성질에 대한 작은 통찰도 없었다. 그러나 한 파업에서 나는 그들의 교육과 '철학'의 산물과 접촉하게 되었다. 몇 달안에 나는 그렇지 않았으면 수십년 걸릴 것들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사회적 덕성과 형제애란 외투로 치장한 역병걸린 매춘부에 대한 이해로 그것에서 이 지구를 떼어내기를 희망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인류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계속  건설노동자로서의 그들과의 접촉에서 느꼈던 "깨달음"에 대해서 말한 뒤 반노동자적 정책으로 그 영향력을 오히려 키워주게 된 브루조아 정당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그 시대를 통해 하층 독일인의 삶 속에서 오히려 헌신, 절제, 우정, 겸손의 미덕을 발견한 것을 자랑했다.

 

히틀러에게 감화를 주었다는 레오폴트 선생의 경우에는 독일민족을 위해 모국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기를 바란 히틀러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에 충성했으며, 따라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무척 화를 냈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전쟁관을 들어보면 더욱 우스꽝스럽다. 그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어놓고 그가 경멸한 슬라브인들을 놓고 끝내 충돌을 빚었다. 확전하게 된 동기가 되는 히틀러의 이상이란, 게르만족에게 봉사할 노예로 운명지어진 슬라브인들을 정복해서 게르만족의 공영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신대륙 발견 후 아프리카에 노예사냥에 나선 유럽인 처럼 인종혐오야 그렇다 치고 역사의 시계바늘을 완전히 꺼꾸로 돌리고 있었다. 이런 인물을 지도자로 가진 나라의 운명은 정해질 수 밖에 없다. 잘 되는 나라의 지도자라고 별다른 건 없지만 저겅도 이런 수준의 생각의 표출은 견제되고 억제될 수 있는 것이 큰 차이인 것 같다. 

 

 

<나의 투쟁> 1권의 초판 사진

 

 

 

 

  1. 1차 대전의 도화선이 된 바로 그 사건. [본문으로]
  2.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합병.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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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chopenhauer

노래 둘

분류없음 2014.06.29 23:37

변진섭 -숙녀에게

 

 

이상우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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