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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

프랑스의 신교도

 

오래된 영화 중에 영화만으로 그 사회역사적 배경을 종잡을 수 없었던 <여왕 마고(La Reine Margot)>라는 것이 있었다. 악녀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란 섭정 선왕비가 딸의 신교도와의 정략혼 행사를 이용 성바르톨로뮤의 대학살( Bartholomew's Day Massacre)을 저지른다는 내용이다. 그 악녀는 자신의 또 다른 아들 앙주 공작을 왕위에 올리려고 마고(Margot)와 그 정략적 부군 나바르(Navarre) 왕 앙리(Henri) 그리고 그의 연인 라몰La Môle)[각주:1]을 위협한다. 현왕이자 역시 그녀의 아들인 샤를(Charles) 역시 그녀의 음모에 희생되는 것으로 암시된다. 결론은 앙리는 달아나고 라몰은 죽게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나바르의 앙리는 앙리 3세가 되는 앙주 공작의 사후 그를 계승한 후 앙리 4세로 즉위 후 카톨릭으로 개종[각주:2]한다. 마고가 발로와 왕조의 최후의 인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학살하면 80년 광주를 연상하지만 이 학살 사건은 프랑스의 신구교 대립의 와중에 그 정점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한다. 잘 알려진대로 프랑스의 신교도들을 위그노(Huguenot)라고 하는데, 이들은 스위스로 망명했던 칼뱅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국교인 카톨릭을 비판했기 때문에 탄압받았고, 이런 저런 불평불만자들의 세를 규합한 이들도 이에 대항해 결국 내전으로 까지 비화되었다. 1570년 8월 5일 세차례의 종교내전도 국왕 샤를 9세(Charles IX)와 위느고의 콜리니(Gaspard de Coligny) 제독 사이의 생제르맹성(Château de Saint-Germain) 평화조약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공직이 위그노에게 개방되고 마고와 앙리 사이의 결혼이 약속되었지만, 종교적 진리가 손상되는 데 대한 카톨릭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혼 직전 결혼을 마지못해 허락한 앙리의 모후인 섭정비 잔(Jeanne III of Navarre)이 죽는데 이것 역시 독이 묻은 서신 등을 보낸 카트린느의 소행이라는 설이 있다. [각주:3]  결혼식은 1572년 8월 18일 노틀담 성당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는데 카톨릭을 지지하는 파리시민들은 여기에 위그노 유력인사들이 집합한다는 것을 노린다. 22일 콜리니가 저격되고 이것이 신구갈등과 불신을 재점화 하였다. 파리 밖에는 위그노 군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모후와 국왕이 참석한 회의에서 학살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다고 한다. 24일부터 성바르톨로뮤 대학살이 벌어져 카톨릭 지지자들에게 결혼식에 참석하러온 위그노들이 학살되고[각주:4] 지방으로 퍼져간다. 부르봉의 앙리는 마고의 비호로 다른 신교도들과 함께  살아남고 이듬해 앙리는 혼자서 나바르로 도망하는데 성공한다. 마고가 왔을 때 그들은 따로 애인을 두는 이름만 부부인 사이였다.

 

보통 속설은 유약한 국왕을 카트린 비와 앙주 공작 그리고 이탈리아 출신의 고문들이 기즈가의 지지를 받아 꾸민일이라는데 뒤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여왕 마고>의 시각은 대체로 그와 같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큰 의문은 과연 모든 것은 "악녀(?)" 카트린의 욕심에서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기즈파나 국내 카톨릭이나 정권파벌다툼 등 학살을 초래할 요인들은 다른 곳에도 있었으며 카트린과 국왕파는 원래 중간적 절충적 입장에 서려 했었는데 그 추가 카톨릭쪽으로 기울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 정도는 확실하다. 1573년에는 가해자들에 대한 사면이 있었다. 자신의 치세에 있었던 대학살 때문인지 국왕 샤를은 괴로와 하다 결핵으로 2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상하게도 거기서 임종전 그가 부른 것은 나바르의 앙리였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제여, 자네는 좋은 친구 하나를 잃는 것이라네. 내가 들은 걸 모두 믿었다면 자네는 살아있을 수가 없었을 걸세. 그러나, 항상 자네를 사랑했었지... 나는 내 아내와 아들을 자네만이 돌보아 줄거라고 믿네. 신에게 내 가호를 빌어주게. 안녕."

 

그러나, 왕을 계승한 것은 사후 폴란드에서 돌아온 왕의 동생인 앙리 3세였다. 이 앙리 3세 역시 나바르의 앙리에게 호의를 보인 편이다. 기즈가문의 앙리는 카톨릭동맹을 만들어 카톨릭박멸과 국왕퇴위를 목표로 심지어 왕권에 도전하는데, 파리에서 도망했던 국왕은 나바르왕과 동맹한 끝에 기즈의 앙리를 살해하고, 그 댓가로 자신도 암살당한다. 어수선한 내전의 끝은은 1598년 앙리 사후 나바르의 앙리가 앙리 4세로 즉위하면서다. 그는 결국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낭트 칙령을 내려 카톨릭을 국교로 한 상태에서 신교에 대한 관용을 확립한다. 태양왕 루이 14세 때에 이르면 다시 박해가 시작되어 무수한 위그노파 해외 망명자들을 양산하는 신판 엑소더스를 연출하게 된다. 그 결과 프랑스의 신교 인구는 혁명전 1760년대 기준 70만 인구의 2%로 그나마 20만은 알자스의 루터교 신자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 중세도 현대도[각주:5] 아닌 그 어느 날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왕 마고의 포스터

 

 

 

 

 

 

  1. 가공 인물인 듯. [본문으로]
  2. 사실 칼뱅파는 군주가 아니라 군주제 자체에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영화에서도 샤를 국왕이 자기 애독서에 묻은 독으로 죽는 것으로 된다. [본문으로]
  4. 국왕은 26일 의회에서 자신이 반역하려는 위그노파의 학살을 명했다고 했다. 카톨릭지지자에게는 위그노 쿠데타에 대한 적절한 대응일 뿐이었다. [본문으로]
  5. 역사학에서는 대체로 바르톨로뮤 학살 이후의 시점 부터를 "modern"으로 보는 것 같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