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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

플라톤의 <국가>와 정의(正義)

드디어 2013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 년말에는 대통령선거가 뜨거운 관심 속에서 치러졌다. 선거 자체에 대해서는 양대후보 사이에 공약이 차별화되지 않은 유권자 입장에게 호소할 것이 없었던 선거라고 하고 또 TV토론도 훌륭한 맞수가 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었건만, 투표율과 시청율 만큼은 어느 때보다 높이 치솟았다. 그러한 열기에는 고질적이라 할 지역별 투표성향에 더해 최근 점점 심화되는 세대별 투표성향에 보이는 지금 한국 사회의 갈등과 대립도 한 몫했다고 볼 수 있겠다. 요는 지금의 여러가지 혼란과 경제적 침체로 인한 민생고와 그로 인한 갈등이 이처럼 1년전에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정치열기로 나타나 은근한 민심의 거센 바람과 그 방을 드러낸 것이다.

비록 여당 후보가 당선되었을 망정 그가 현직 대통령에 대해 보여준 차별성을 생각해 보면, 민심은 "이대론 안 되겠다"는 변화에 대한 열망을 최대한으로 투표율로서 표출한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올해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 사회의 키워드는 역시 "변화와 개혁"이 되겠는데, 최근의 나는 한 그리스의 대철인(大哲人)의 작품에서 오늘날의 한국인이 개혁·개선을 국가·사회에 요구하는 바와 같은 강도의 관심과 열정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겸해서 그에 대한 진지한 지적 모색을 부족하나마 대략 살펴볼 수 있었다. 그 책이 바로 플라톤(Plato)의 <국가(The Republic )>이다.

그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정의(正義)"로, 저자 플라톤이 자신이 뜻하는 이상세계 혹은 이상국가에 가까운 사회란 바로 정의가 실현된 사회임을 올바로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보더라도 단지 여당 후보가 당선된 결과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회문제까지 되고 있으며 그것으로 실제 자살하는 사람들이 수명씩 나오고 있을 정도로 불평등 불공정 즉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아질 수가 없다"는 절망과 체념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보면 플라톤의 소론은 바람직한 국가라는 주제를 잘 집어내고 있는 셈이다.

다만, 플라톤이 말하는 정의는 지금 보통사람들이 공감할 그런 것은 아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상국가는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이며 비록 그는 이것을 타락한 형태의 귀족제인 과두제(oligarchy)와는 구분하고 있지만, 거기 드러난 제한적으로나마 나타나는 계급제나 공산제적인 요소는 공감은 커녕 혐오감 마저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자신의 사상을 대변하는 역의 소크라테스(Socrates)와 기존 사회 통념에 도전하는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의 설전을 보면 당시 아테네에서도 지금 한국에서와 같이 사회정의를 놓고 만만치 않은 갈등과 대립이 있었고 그것이 많은 아테네인들을 아고라로 불러들여 정치토론과 개혁에 대한 논의를 일으켰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 정의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을 살펴보면 대략 아래[각주:1]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토론장에서 참석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정의(正義)라는 것은 빚만큼 갚는다는 것이거나 우군(友軍)에게는 선을 행하고 적군(敵軍)에게는 해를 가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모두의 존경을 받는 현인 소크라테스는 의로운 사람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는 생각을 피력하며 그에 대한 반례를 제시한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위선으로 보는 트라시마코스는 역겨움을 느낀다는 듯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다름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그에 의하면 강자가 설치한 통치기구가 부과하는 법이란 그 통치자의 이익을 대변할 뿐인 것이다. 이에 덧붙여 그는 정의는 강자에게 이로운 것이며 부정(不正)이야 말로 자기 자신에게 이로운 것이라는 선동적인 매니페스토를 내놓는다. 소크라테스는 지배자가 자신을 위해 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며 곧 트라시마코스를 설복시키는데 성공한다(비록 진심인지는 모르겠으나). 한편, 클라우콘(Glaucon )과 아데이만토스(Adeimantus )는 이번에는 의로운 자가 의를 행하는 것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니라 다른 강제나 결과로 얻어지는 이익 때문이라는 의견을 소개한다.

바로 이러한 도전들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개인이 아닌 좀더 넓은 국가라는 규모에서 옮겨 고찰함으로서 응전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말하는 소위 유토피아상으로서의 이상 국가의 조직과 그 속에서 각 성원의  구분과 역할, 가져야 할 자질과 개개의 덕성들이 광범위하게 검토 제안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의를 분업화 혹은 계급화로 차별화하는 것은 "그"가 시모니데스(Simonides) 식의 "각자에게 알맞는 것을 하게 하는 것"[각주:2]이라는 의미의 정의에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독자라면 전사계급중시와 철인왕을 조건으로 하는 그의 이상국가에 물론 공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플라톤 역시 당시 민주주의를 체험한 아테네인들이 이러한 사상에 큰 반발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개혁에 관심을 갖는 부(富)의 분배문제에 있어서도 플라톤이 내놓는 답은 처자의 공유까지를 요하는 공산적인 모델인데 이가 국가의 분열을 방지하는데 필수적이라고 변명하고 있다.[각주:3] 이 역시 현대의 독자들을 쉽게 설득시킬 수 있을 주장은 아니며 비상식적이다.

그러나, 더 개악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런 방안들을 내어놓는 플라톤의 동기의 절박함을 보여주는 조금이나마 그 심정만은 이해하게 해주는 단락들도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개혁의 추진이 그에 대한 반발하는 세력때문에 극히 어렵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상황말이다.

“전체 국가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어떨 것 같은지? 혹은 이런 그릇된 식의 학정을 하며 시민들에게 그 국가의 일반적인 체제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미리 경고하며 이를 시도라도 하면 사형선고를 내리는 그런 나라들의 방식이라면 어떨까? 반면에 가장 통치받는 대로 유순하게 따르는 자들 꼬리치며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는 자들은 선한 자이며 현자라 평가해주며 즐겨 영예를 바치는 나라는 어떤가?[각주:4]

이러한 개혁을 어렵게 하는 여러 요소들의 존재를 잘 아는 플라톤이기에 그 이상국가의 실현방안을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겨우 "불의를 경멸하고 정의의 선함을 통찰할 혜안을 가진 다년간 수련한 철인왕만 탄생하면 곧바로 이상국가가 이루어질 것이라"[각주:5]는 전망의 유치함에 대해는 눈을 감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우리 사회의 변화를 바라던 한사람으로서 지나치게 이념과 명분에 매달려 기본적인 삶에 진실에 관한 것들은 무시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들 중에 정의 또한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 "정의"라는 것이 역시 불법적 폭력적 수단으로 집권한 어느 독재자가 내세운 대의명분이기도 해서 막연히 안 좋은 단어라고 생각해 온 면도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을 대충이나마 읽어본 이 순간 정의야 말로 우리 사회의 개혁에 관해서 두고두고 회자될 핵심적인 지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금의 시련을 이기고 보다 발전 성숙한 대한민국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첫 글을 플라톤의 <국가>로 시작해 본다. 부디 내가 느꼈던 플라톤과의 시대를 넘어선 공감이 실망으로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1. 주로 위키백과의 내용을 참고하였음 [본문으로]
  2. Plat. Rep. 1.331e [본문으로]
  3. Plat. Rep. 5.464 [본문으로]
  4. Plat. Rep. 4.426 [본문으로]
  5. Plat. Rep. 7.54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