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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평

타키투스(Tacitus)의 연대기

 타키투스의 연대기 타키투스 지음 | 박광순 옮김 | 범우 | 2005.01.05

 

말이 필요없는 책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에야 한국에서는 첫 번역되었다. 박광순의 번역물이 대부분 그렇듯 다행스럽게 혼신의 힘을 다하고 정성을 들인 역작(力作)인 동시에 다른 번역물들에 비해서도 상당히 잘된 편이다.[각주:1] 이 책의 내용을 읽어보면 흔히 사마천과 동급의 서양사가로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와 함께 손꼽히는 이 저서가 2005년에야 처음 번역소개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티베리우스 이래 악명높은 폭군들의 통치시대의 통치술은 과거 한국의 군사독재시절이나 "꼼수정치"를 펼친 그 후대의 "암군"들의 정치와 기본적으로 공통점이 많은데 놀랄 것이다. 이런 책이 시중에 널리 읽힌 다면 아마도 독재나 무단정치와는 양립될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이 책의 번역을 "번역은 잠시 나마였지만 정권교체를 이뤄낸 민주진영 승리의 기념비"로 보고 싶다.

 

어쨌든,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티베리우스 시대의 필화(筆話) 사건들이다. 사실 동양의 역사가가 화를 입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사마천이 사형을 면하기 위해 궁형의 수치를 참았던 것과 반고가 사형을 당한 일은 명분은 어찌되었던 그들의 주요 작업과 관계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붙여졌던 다른 혐의들은 한낱 꼬투리잡기 위한 핑계거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역사서-반드시 그 뿐만 아니지만-에 관한한 필화사건이 없었을 으로 보였던 서양고대 바로 이 "팍스 로마나" 시대에도 필화에 연루돼 스스로 자살한 역사가가 있었고 이를 타키투스가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 사람의 저작은 실전되었고 그에 바탕해서 새롭게 역사를 쓴 타키투스와 다른 소수만이 그 저서를 남기고 있는 탓도 있다. 그의 역사책 이름 역시 타키투스와 같이 <연대기>였고 이 역사가의 이름은 아울루스 크레무티우스 코르두스(Aulius Cremutinus Cordus)였다. 타키투스는 이 코르두스가 자신을 변호하던 연설문을 기록했는데 그 글을 읽으면 과연 그의 재능과 인격의 고귀함을 짐작케 해 그의 역사책이 알려지지 않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아래 코르두스의 연설은 아래와 같다.[각주:2]

 

"존경하는 원로원 의원 여러분! 내 말이 지금 심판받고 있는데, 행동에 관해 나는 죄가 없습니다. 말조차 반역죄가 보호하는 단일인들 군주와 그의 일가족을 겨냥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브루투스(Brutus)와 카시우스(Cassius)[각주:3]를 칭송했다는데, 그들의 행동을 기록했던 것은 수많은 다른 펜들도 마찬가집니다. 리비우스(Livy)[각주:4]는 능변에 대한 명성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정직함으로 폼페이우스(Pompey)[각주:5]에 대한 찬사를 써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부터 "폼페이우스파"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둘의 우정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스키피오(Scipio)와 아프라니우스(Afranius)[각주:6], 바로 이 카시우스(Cassius), 그 브루투스(Brutus)에게 지금 그들에게 유행하는 칭호인 악당이나 존속살해범이라는 말을 그는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뛰어난 애국자에게 쓰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아시니우스 폴리오(Asinius Pollio)[각주:7]는 그들의 성격을 고귀한 톤으로 다루었습니다. 메살라 코르비누스(Messala Corvinus)[각주:8]는 카시우스(Cassius) 밑에서 복무했음을 영광스럽게 그렸습니다. 폴리오와 코르비누스는 부와 영예의 충만 속에서 살다 죽었습니다. 키케로(Cicero)의 책이 카토(Cato)를 하늘 높이 찬양할 때, 독재관 카이사르(Caesar)가 끌어낸 것이 공공장소에의 연설문 이외에 무엇을 사용했습니까?[각주:9] 안토니우스(Antony)의 편지와 브루투스(Brutus)의 연설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욕설-의심할 바 없이 극도로 그릇되고 실랄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읽히는 비바쿨루스(Bibaculus)와 카툴루스(Catullus)의 시들은 카이사르들 상스러운 욕으로 채워집니다. 그러나 신성(神性) 율리우스(Julius)와 신성(神性) 아우구스투스(Augustus) 자신도 그것을 참아냈고 그들을 평안케 놔두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관용이나 현명함으로 돌려야 할지 망설여 집니다. 무시된 일은 곧 잊혀지지만, 분노된 일은 사실로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인들에 대해서는 넘어가려 합니다. 자유 뿐 아니라 방종도 그들에겐 처벌 받지 않고, 한 인간이 복수하려면 말과 말로서 겨룹니다. 그러나 검열에 다른 무엇보다 자유로운 것은 죽어서 원한이나 당파성의 범위를 넘어선 자들에 대한 의견의 표명입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필리피(Philippi)의 평원에서 무기를 들고 내가 조국을 내전으로 이끌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경우가 그들이 죽은지 70년이 된 지금 그들을 이긴 자들 자신도 없애지 않은 그들의 상으로 알려지고 그들의 기억이 역사에 의해 기념되고 있는 그러한 것입니까? 모든 이들에게 후손들은 존경을 보냅니다. 만일 내가 단죄된 다면, 사람들은 부르투스와 카시우스 뿐 아니라 나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하 추가] 좀 아쉬운 번역의 예를 들면 62페이지의 경우이다.

 

원로원은 아우구스타에게도 온갖 아첨을 다 떨었다. 어떤 사람은 그녀에게 '조국의 어버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국모'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티베리우스의 이름 앞에 '율리아의 아들'을 덧붙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되풀이해서 이렇게 주장했다. "여성에게는 무리하지 않은 명예만이 주어져야 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나 자신도 주어지는 명예를 적절히 자제할 것이오." 하지만 실은 그는 이 제안에 질투도 나고 화도 났던 것이다. 그는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보고 릭토르(속간을 들고 앞길을 비키게 하던 고대 로마의 하급 관리)를 그녀에게 붙이자는 결의조차 승인하지 않으려 하고, '양자 결연 제단'의 건립이나 그와 비슷한 명예도 금했다.

 

여기서 '양자 결연'이라 함은 대체로 남자를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자칫 티베리우스 자신이의아우구스투스와의 양자 결연을 말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될 수가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52페이지에서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에 "리비아는 율리우스 가의 양녀가 되는 동시에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이름을 수여받"았다는 말이 있다. 이 번역은 마땅히 "양자 결연"이 아닌 "양녀 결연"이 되어야 뜻이 분명한 경우였다. 리비아 드루실라 자신은 명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후손이지만 그런 그의 아버지가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양자로 간 까닭에 리비아 드루실라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던 것인데, 남편의 유언으로 카이사르 가문의 양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양녀"가 아니면 "입양"이라도 되었어야 했는데 처음에 역자가 무언가 착각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그러나 전체 내용을 읽어보면 후에는 역자가 이를 교정할 기회가 있었는데 교정되지 않고 모호한 채로 남았다. 역자가 일시적으로 착각했는지 아니면 단순 실수인지 모르지만 번역을 끝낼 쯤에는 알았을 것이 틀림없는데 혹은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사정 때문인지 바뀌지 않았다. 물론 사전을 찾아봐도 법률적으로 양자는 입양한 자식이므로 엄밀히 틀린 번역은 아니다. 사실 이러한 로마사 원전의 번역은 로마사 전공자에게도 어려울 일이라 역자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결코 완벽한 하지는 않다.

 

 

 

  1. 아무대로 작업범위가 고대사를 넘어서는 박광순 보다는 고전 희랍라틴문헌 번역에서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인 천병희 선생을 내심 바랐지만, 오히려 여러 문헌을 참고한 꼼꼼하고 자세한 주석과 부록 등은전공자에게 조차도 크게 도움될 정도의 합당하고 좋은 번역이었다. [본문으로]
  2. 영역을 중역하였는데 아마도 박광순의 역은 보다 직역에 가까울 것이다. [본문으로]
  3. 아우구스투스의 양부인 카이사르의 살해했으며, 내전 중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에게 패함. [본문으로]
  4. 공화정 시절에 대한 로마의 역사가. [본문으로]
  5. 크라수스와 함께 카이사르의 삼두(三頭) 공동통치자였으나, 후에 카이사르와 내전 끝에 패망함. [본문으로]
  6. 이들은 각기 폼페이우스의 장인과 부관으로 탑수스의 재난 이후 죽는다. [본문으로]
  7.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유명한 문필가 이자 역사가. [본문으로]
  8. 카시우스,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를 차례로 섬겼다. [본문으로]
  9. 카이사르는 두 권의 책인 반카토론(Anticatones)으로 답했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