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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 eis heauton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에서 2

 

 

 

 

 

12. 그대 자신에게 잘못하다니. 그대 자신에게 잘못하다니. 내 영혼이여. 그렇게 되면, 그대는 더 이상 그대 자신을 존중할 기회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충분하지만 그대의 것은 거의 끝난 것이다. 영혼이 스스로를 존중치 않고 그대의 복리를 타인의 영혼에 둔다면 말이다. (6장)

 

13. 그대를 덮쳐 혼란시키는 외부의 일을 하는가? 그대 자신에게 새롭고 선한 것을 배울 여가를 주고 넋나간 듯 돌아나니는 것은 그만 두라. 하지만 그 때야 그대는 또한 다른 길로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 행동으로 삶에서 자신에게 지쳐있으며 매순간 모든 생각을 쏟고 이끌 목표가 없는 빈둥거리는 이들이 있다. (7장)

 

14. 다른 이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의도와 동기)을 보지 못한 것으로써, 한 인간이 불행해 보이는 것이 드문 편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의 운동을 보지 않는 자는 필히 불행할 것임이 틀림없다. (8장)

 

15. 이것을 그대는 항상 마음 속에 새겨라. 전체의 본성은 무엇이며, 무엇이 나의 본성이며, 어떻게 그것이 다른 것과 관계되며 어떤 부분이 어떤 전체의 것이며, 그대가 그대가 일부인 본성에 따르는 것들을 행하고 말하는 것을 방해할 이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9장)

 

16.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us)는 악행들에 대한 비교—인류의 공통 관념에 맞춰 할만한 그런 비교—에서 진정한 철학자인 것 처럼 말하기를, 욕망을 통해 범해진 범죄는 분노를 통해 범해진 범죄보다 더 죄가 무겁다고 했다[각주:1].분노로 흥분한 이는 특정 고통과 무의식적 진통으로 이성에 등돌린 것으로 보이지만 욕망으로 범하는 자는  즐거움에 눌려 그의 범죄에 더 방탕하고 더 여자답게 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올바르고도 철학적으로 가치있게 그는, 즐거움으로 범해진 범죄가 고통으로 범해진 범죄보다 무겁다고 그리고 대개 후자는 처음 잘못하고 고통을 통해 분노하게 되는 사람에 가깝고 전자는 그 자신의 충동으로 잘못을 하여 욕망으로 행하는 쪽으로 빠진다고 하였다.  (10장)

 

17. 이 순간부터라도 삶을 떠날 수 있다[각주:2]는 것을 아는 것 처럼, 그에 따라 모든 행동과 생각을 통제하라[각주:3]. 그러나 인간들 속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신이 있다면 두려워 할 것이 아닌데, 신들이 그대를 악에 연루시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만 존재치 않거나 인간사에 관심이 없다면 신이 결여되거나 섭리가 결여된 우주에서 산다는 것이 내게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진실로 그들은 존재하고 인간사의 일에 주의를 두며 인간의 그가 실제 악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는 능력에 모든 수단을 둔다. 나머지에 관해서, 악한 것이 있다면 이 또한 그들은 준비하여 그에 빠지지 않을 인간에 힘을 보태리라. 한 인간을 더 나쁘게 만들지 않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더 나쁘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무지를 통해서도 그에 맞서 지키거나 그를 교정할 능력이 아닌 지식을 갖는 것으로도 전체(우주)의 본성이 그것들을 간과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능력의 부족이나 기술의 부족 어느 것으로도 그렇게 큰 실수를 해서 선과 악이 무차별적으로 선인과 악인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도 가능치 않다. 그러나 생사, 영욕, 희노애락—이 모든 것이 동등하게 선한 사람과 나쁜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우리를 더 낫게도 나쁘게도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그것들은 선도 악도 아니다. (11장)

 

18. 얼마나 빠르게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리는가 즉 육신적 형태들이 실제 세계와 시간에 흐름 상의 기억 속에서 삼켜져버리는가를 이해하는 일이 우리의 이성적 기관이 할 일이다. 이들이 모든 감각있는 것들인데, 특히 즐거움이란 미끼에 끌리고 고통으로 두려워하며 증발될 명성에 대한 허영에 빠진다. 그것들은 얼마나 무가치하고 경멸스럽고 추하고 사멸적이고 죽은 것인가! 이는 모두는 곧 관찰할 인지적 작업의 일부다. 이들이 어떤 피조물이고 누구의 의견과 목소리가 명성을 주는지 죽음이 무엇인가? 한 사람이 그 자체를 보고서 그 안에 상상으로서 제출된 모든 것들을 기억에 대한 추상력으로 각 부분들로 나누어 보면 그는 이를 본성이 행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본성이 행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 한다면 그는 아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죽음)는 본성의 행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본성의 목적에 유용함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신"에게 접촉되는 방법과 그의 어떤 일부로 어떤 부분 어떤 상태로 그렇게 되는지를 우리의 이성적 능력은 파악하여야 한다. (12장)

 

19. 자기 안에 령(靈)에 주의하고 그것을 진실로 숭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주위에 온갖 데로 가로질러 다니다 땅 아래까지 가서 캐내려고 하고 이웃의 마음을 짐작해 알려하는 사람보다 비참한 자는 없다. 그리고 령에 대한 존경은 격정과 경솔함 신과 인간에게서 오는 것들에 대한 불만을 비운 순수함을 유지하는데 있다.  신에게서 오는 것은 그들의 탁월함에 대한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인간에게서 온 것은 동질성이란 이유로 우리에게 아껴져야 하기 때문인데 그래도 때때로 그것들이 선악에 대한 인간의 무지를 이유로 우리의 안타까운 감정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 결점은 흑백으로 된 것을 분별하게 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서 앗아갔을 때 못지 않다. (13장)

 

20. 그대가 삼천년을 아니 그 열배 삼만년을 산다더라도, 어던 인간도 지금 사는 이 것 외에 다른 삶을 잃게 되지는 않으며 그가 이제 잃을 이것 외에 다른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최장이던 최단이든 똑같은 것으로 귀결된다. 사멸되는 것은 같지 않아도 현재는 모두에 같고 잃는 것은 한 순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거나 미래를 잃지 않는다. 인간이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그에게서 그걸 취한단 말인가? 이 두가지를 그대는 가슴에 새기라. 하나는 영원에서 비롯한 모든 것은 같은 형태이며 한 원 주위를 돌며 인간이 일백년 이든 이백년이든 무한시간이든 같은 것을 볼 것인지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가장 긴 삶을 산 이와 가장 빨리 죽은이는 바로 똑같이 잃는다는 것이다. 비록 이가 그가 가진 유일한 것이라는 것과 인간이 그가 가지지 않은 것을 잃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현재가 한 인간이 잃을 수 잇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14장)

 

21. 모든 것이 의견임을 기억하라. 견유학파 몸니무스(Monimus)가 말한 것은 분명하다. 그 유용성도 분명한데 진실이 이를 확신해 주는 한 이것을 받아들인다. (15장)

 

22. 인간의 영혼은 자신을 그르치는 일을 하는데 우선 그것이 종기가 말하자면 될수 있는 대로 우주의 종기가 되었을 때 그렇다. 일어난 일에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본성에서 우리를 떼어놓는 것인데, 그 일부엔 모든 다른 것의 본성이 담겨있다. 다음으로, 영혼은 어떤 인간에게서 돌아설 때나 심지어 화난 영혼처럼 해칠 의도로 그에게 다가갈 때 스스로를 그르치는 일을 한다. 세째로, 즐거움이나 고통에 압도되었을 때 그르치는 일을 한다. 넷째는 부분 역할을 하는 때는 성실하고 진실치 못한 것을 말할 때다. 다섯째는 자기 행위나 움직임이 목적없이 되게 거나 경솔하고 그것이 무언지 생각하지 않고 행할 때인데, 여기서 가장 작은 일 조차도 한 목적에 대해 행해지고 이성적 동물들의 목적은 가장 고대적이며 존경받는 도시와 정체의 이성과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옳은 것이 된다. (16장)

 

23. 인간의 생에서 시간은 한 점이며 실체는 한 유출이며 그 지각은 둔하며 전 신체의 조성은 부패에 속하면서 영혼은 도는 팽이요 행운은 거의 불확실하고 명성은 판단력의 잘못이다. 그리고 이 한마디로 다 아우르자면 신체에 속하는 것은 물의 흐름이고 영혼에 속하는 것은 꿈과 증기며 생은 전쟁과 이방인의 여행이고 명성이후는 망각이다. 인간을 안내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한가지 유일한 것은 철학뿐이다. 그러나 이는 폭 인간의 령(靈)을 폭력에서 자유롭고 다치지 않게 하여 고통과 즐거움에 대해 우월게 하고 목적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릇되거나 위선을 가지지 않게 하고 다른 사람이 하고 하지 않는데 필요를 느끼지 않게 하며 일나난 일과 거기서 할당된 바는 모두 받아들이 것과 마지막으로 쾌활한 마음으로 죽음에 그것이 모든 생명이 구성 요소의 해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듯 임하게 한다. 그러나 각기 서로서로로 변해가는 요소들에 자체로 해를 주지 않는다면 왜 한 인간이 모든 요소의 변화와 해체에 관해 근심해야 할까? 그것은 본성에 따르는 것이며 본성을 따르는 데는 아무것도 악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카르눈툼(Carnuntum)에서 쓰였다[각주:4].  (17장)

 

 

  1. 모든 범죄는 동등하여 비교할 게 없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파라독스라고 한다. [본문으로]
  2. "떠나는 것은 그대의 손에 달렸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본문으로]
  3. Cicero, Tuscul., i. 49. [본문으로]
  4. 비엔나(Vienna) 동쪽 삼십 마일 쯤 되는 에서 다뉴브 이남의 판노니아(Pannonia)에 있다. 오로시오스(Orosius, vii. 15)와 에우트로피우스(Eutropius, viii. 13)는 안토니우스가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삼년간 이 곳에 머물렀다고 말한다. [본문으로]